남궁 억 선생 : 학교 재정은 어떻게
그때야말로 교육을 위한 교육이었고 학교를 운영하는 데는 오늘과 같이 수월하지 못했다. 지금은 수업료를 4기로 나눠서 1기에 3개월분씩 납부하게 되어 있어 가령 4, 5, 6월의 1기분을 받을 때 벌써 3월 10일쯤 고지서를 발부하여 기한을 20일까지 하고 납부 기한이 넘으면 학생이 등교하더라도 결석으로 하고 심지어는 시험장에 안 들여세우는 등 4월도 되기 전에 미리 받으면서 학부형과 학생들에게 고통을 주는 모리화(謀利化)한 교육 정신에서 타락된 오늘의 학원이지마는 그때는 모곡학교로서만 보더라도 150여 명밖에 안되는 학생에게서 수업료 20전씩을 징수하나 30환밖에 안되었고 이도 못내는 학생은 면제해 주었다.
그러나 교장은 제외하고라도 3명의 교사가 있었는데 20환, 40환, 45환이 지출되었다. 그 당시 수업료로는 교사 1명의 봉급을 겨우 지출할 뿐으로 그 나머지는 선교부로부터 받는 보조금과 무궁화, 뽕나무 묘포에서 나는 수입으로서도 모자랄 때는 선생이 지방으로 나아가 친지들에게서 찬조를 받아 충당했다.
학교의 기본 재산으로 논 100두락(100斗落)이 있어 받아들이는 도지(賭地)로는 학교의 경상비와 연말 상여를 충당했다.
교도(敎導) 개황(槪況)
(1) 교재 선택
① 문자와 내용
교재를 작성할 때는 무성의하게 남이 기술한 것을 그대로 채용하지 않고 쉬운 한자에 한글을 혼용하여 사용했으며 내용에 있어서는 일본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수종(隨從)하지 않고 항시 한국을 표준으로 한 교재를 작성하여 교수하기에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② 음악
현대음악 곧 양악에 있어서 특히 정확한 청음과 음감에 자신이 있고 작사에도 능했으며 성대가 좋아서 청아한 음을 소유했을 뿐만이 아니라 구악(舊樂)에도 소양이 깊었다. 음악 교재를 선택함에 총독부의 편찬 교과서는 무미건조한 것이므로 채용하지 않고 선생이 작사하고 곡을 빌려 오거나 작곡을 하였다. 그 당시에 유행되던 창가는 모곡학교에서 산출되었으니 음악 교육이 충실했다.
③ 한글 붓글씨(궁체 글씨)
선생은 붓글씨도 기능이 있고 취미였으므로 학생들 지도에 자신있는 지도를 하였다. 한 주간에 한 번 있는 서도(書道) 시간 외에 희망자에는 괴로워 않고 재미있게 지도 방법을 썼던 것이니 그의 제자들은 모두 붓글씨에 능했다. 또한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 과 중등 조선말본 책의 제자(題字)도 선생이 쓰신 것이다.
④ 단체훈련
체조 시간을 치어라 끝시간에 많이 넣어서 등산을 하되 오르기 어려운 벽곡을 기어이 같이 오르고 산봉에 올라 강하(江河)를 보이며 심신을 단련시키고 인내력을 길러주었으며 여름에는 수영을 시켜 체위(體位)의 향상을 도모했다.
⑤ 근로의 정신
실습 시간에는 으레 무궁화와 뽕나무 묘포(苗圃)의 작업이었으나 철을 따라서 봄이면 공한지(空閑地)에 나무를 심는 버릇을 주고 인근 부락의 교량(橋梁)이 무너지면 "내 마을은 내 손으로"라는 표어를 세우고 학생들로 작업을 하게 하며 도로 수선을 통하여 봉사의 정신을 길러주었고 눈이 올 때에는 실내에서 새끼 꼬기, 짚신 삼기, 마부시 틀기, 가마니를 짜게 했다.
(2) 특별지도
① 독서회
그 당시에 서울에서 출판되는 서적을 구입해 들여서 윤독을 시켰고 때로는 모여 앉아 자기의 읽은 감상이나 내용을 이야기하게 하여 꼭 읽지 않으면 안되게끔 지도하였고 "좋은 책을 읽은 일은 음식을 먹음과 같아서 배탈이 나지 않는다"를 금언으로 삼았다.
② 토론회 및 웅변회
정기적으로 토론회 또는 웅변회를 열어서 학도들의 변증(辨證), 변박(辨駁), 변호(辯護)의 변론술을 연마시켰다. 토론회와 웅변회의 제목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생활 개선 등의 문제를 추려 웅변을 통하여 민족사상을 길러주었던 것이나 한국말과 한글을 못쓰게 하던 시대에는 한국말과 일본말로 이중의 준비를 하여 낯선 사람이 혹 오면 일본말로 진행했다.
(3) 정서교육
학교와 교회가 연합해서 연중 행사로 성탄일, 꽃주일(어린이날) 외에 학교에서 독(獨)히 학예회를 해마다 행사하고 음악, 연극, 시가를 통하여 정서교육을 하였다.
물론 이마만한 지도자가 어디는 없었을 바 아니나 선생의 생각하고 지향하는 민족교육을 감히 흉내할 용감한 지도자가 없었다.
실례로 들자면 선생이 왜경에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갇히던 그 해(1933)까지 [무궁화와 역사 교육]을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교수해 왔던 것이다.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13-06-10 1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