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 선생 : 무궁화 사건의 발단
사건의 발단은 선생의 뒤를 이어 모곡학교를 맡을 사람을 뽑는 데서부터였다. 모든 교사들이 당시 이기섭을 선생의 후임으로 세우자 하였는데 정구환이란 사람이 나서서 자기가 맡아 보겠다 하여 면박을 당한 일이 있었다. 정구환은 경상도 사람인데 무슨 까닭인지 강원도청에 있는 친구를 찾아가서 일자리를 부탁한 관계로 이곳 모곡학교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특별한 직책없이 학교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이 자가 면박을 받은 후 모곡지서(도리소 주재소) 순사 정도일에게 접근하여 이 참에 학교를 손에 넣어 공로자가 되자 하였다고 한다. 정도일은 평소 일제의 앞잡이로 순사 노릇하는 자신을 아들처럼 대해주시던 선생에 대하여 못할 일이라 여겨 서너 번 거절하였으나 마침내 선생을 배반하여 홍천서에 선생의 무궁화운동을 밀고하게 된 것이다(증언/유제진. 춘천 남면 가정리).
이렇게 해서 5월 어느날 점심시간에 홍천경찰서 사법주임 신현규가 시조사 직원으로 위장하고 애국자로 가장하여 찾아와 선생을 탐문하였다.
그날 점심시간이 되어 학교의 교무주임을 맡고 있던 조용구가 평소처럼 선생의 댁으로 가서 선생과 함께 사랑방에 앉아 막 수저를 들려고 하는데 시조사 직원으로 위장한 40대의 씩씩한 신사가 들어오더니 <시조>라는 잡지 한 권을 내놓고는 가장 독실한 기독교인처럼, 우국지사처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평소 사람을 가리지 않으시는 선생은 그자의 이야기를 흉금없이 들으시고는 그의 우국지사인 양 하는 말에 감동하신듯 동지나 다름없이 대하여 "무궁화 시조(예찬시)"를 한지에 쓰셔서 이를 설명해 주시면서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토로하셨다.
이렇게 해서 이 해 가을 11월 4일 그동안 철저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대책을 세운 홍천경찰서의 신현규와 함께 들이닥친 8명의 사복경관에 의해 학교는 물론 인근 교사와 청년들의 가택은 여지없이 수색을 당하여 짓밟히고 28명의 청년 남녀가 수갑과 포승에 묶인 채 50km 125리 길을 개처럼 끌려가 홍천경찰서에 수감되는 "보리울 무궁화 사건"과 "춘천 선교부 십자가당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 해 12월 11일에는 홍천경찰서로 연행되었던 28명의 청년 가운데 12명의 청년들이 선생과 함께 트럭에 실려 경성지방 검찰청으로 이송되었으며, 이듬해 1934년 3월 1년 복역 3년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복역하시던 선생은 이듬해 7월에 수감 1년 6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시고, 변함없이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을 위해 일하시던 중 1939년 4월 5일 오전 8시 45분 소천하신 것이다.
(정구환이 선생이 세우신 사립학교 교원으로 정식 부임한 것은 사건이 나던 해인 1933년 10월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상황으로 보아 그 얼마 전부터 직책없이 이 학교에서 일했던 것으로 보이며, 무궁화 사건 이후 선생이 세우신 사립모곡학교가 1933년 12월 1일 폐교되고 새로 모곡공립학교가 도리소에 개교하던 소화9년〔1934년〕12월 15일 이 학교의 교사로 재부임하여 후일 해방 후 서면 면장까지 지냈으나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해 서울로 떠났다고 한다.)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13-06-10 1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