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 선생 : 우리 손으로 만들면 그때나 타세
졸업식에 축사를 부탁받은 선생은 당시 모곡학교 출신으로 교무주임을 맡아보던 조용구 씨와 함께 연희전문학교를 향해 길을 떠났다. 때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2월 초순이었다. 보리울에서 연희전문학교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당장에 산길을 걸어 널미재라는 높은 재를 넘어야 했다. 겨우내 쌓인 눈이 녹으려면 4∼5월은 지나야 하니 아직은 눈길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청평까지 30km 걸어나가면 이내 마석을 지나 마치고개를 넘어야 한다. 줄잡아 서울까지 120km는 될 터인데 선생은, 이제 그만 차를 타고 가시자고 수차례 권유하는 젊은 제자에게 "우리 손으로 만들면 그때나 타세" 이 한마디로 마다하시고 3일 내내 3백리를 걸어서 학교에 도착했다고 한다.
당시는 나이 40만 넘어도 노인행세를 하던 시절이다. 환갑 노인이면 지금의 80∼90 노인처럼 상노인에 속하던 때다. 칠십이 다 된 선생이 추운 겨울 이 먼길을 걸으면서 오늘 우리에게 남겨주신 이 한마디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며 유치원서부터 대학원을 나오기까지 이 한마디를 듣고 자란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우리 손으로 만들면 그때나 타세!"
이와 같은 이야기가 선생의 일생을 통해 숱하게 널려 있다. 선생은 평생 동안 일본사람이 만든 중절모를 쓰지 않고 십전짜리 밀짚모자를 쓰셨는데 하루 이틀이 아니고 10년 동안 시커먼 때가 반들거릴 때까지 쓰셨다.
흰 버선에 떡갈나무잎으로 물을 들여 신으시면서 어린 학동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화학물감으로 만든 일본 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리 것이 얼마나 곱고 은은하고 좋으냐!"고 하셨다.
선생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은 밤에 몰래 와서 선생의 짚신 크기를 재가지고 가서 고무신을 사다 드렸으니 이때 검정 고무신을 신기도 하셨는데 이도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여 멀리하셨던 것이다.
이날 선생의 축사 내용은 "산골 농민이 깨어야 나라가 산다"는 선생의 사상과 신념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당시 많은 지도자들은 변절하여 친일의 길을 걸으면서 툭하면 1910년 전 일제에게 침략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금주금연하여 한푼이라도 나라를 위해 모으자며 금주금연이야기나 늘어놓던 시절에 선생의 삶 속에서 녹아져 나오는 민중지향적인 이러한 말씀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값진 것이었다.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13-06-10 15:04